이번 글은 해체주의 건축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주 어려운 내용들인데요. 정말 어떻게 찾아서 공부했는지 잘 기억도 안나네요.
이번글도 참고하기에 좋은 내용이었으면 좋겠습니다.
1_서 론_해체주의 건축 탐구
근대 건축에서 공간은 중요한 주제였고, 건축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했던 근대 건축가들은 공간 개념을 통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 후로, 공간 개념은 건축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과 변화를 대응하면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건축에서 공간에 대한 논의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이유로 근대 건축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간 개념이 제시되지 못하였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로 공간보다는 기호나 유형이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전통적 형태를 선호하며, 과거의 이미지, 기억 등을 중요시하고, 이를 꼴라쥬 형식으로 나타내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되면서 건축은 별다른 논란 없이 스타일의 역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1960년대 이후 건축 담론에서 공간 개념에 관한 논의는 그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1980년대 등장한 해체주의는 기호와 언어, 텍스트, 컨텍스트, 작가, 독자, 비평에 관하여 기존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능성이 주목된다. 따라서 해체주의와 관련된 건축은 건축가의 구상이나 사용자의 행동에 의해 다양한 의미와 주관적 가치를 교환할 수 있는 새롭고 적극적인 대상으로 부각되었으며 근대 건축의 공간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의미를 확장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건축 공간 개념을 선보였다.
– 21세기를 위한 공원
– 제 요소들이 혼재하며 그 속에서의 상호질서와 조합이 이루어진 공간
– 단일되고 통합된 이미지 대신 분열되고 파편화된 여러 다양한 모습을 표현
– 폴리 : 건축가의 의도가 아니라 사용자의 의도에 맞게 변화 가능, 다양한 활동과 사건 유발 -> 데리다가 텍스트 간의 충돌과 접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계속 생성해 내려는 것과 유사
– 각기 자율적인 텍스트로 인해 서로 간섭하고 계속해서 불안정성을 촉발시킴
2_해체주의에 대한 이해
가. 해체이론의 생성 배경
1966년 미국의 Johns Hopkins대학에서 열렸던 「The Language of Criticism and Science Man」이라는 주제의 국제 심포지움에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Structure, Sign, and Play in the Discourse of the Human Science」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구조주의의 원로 Levi-Strauss를 비판하면서 본격적으로 해체주의를 등장시켰다.
주로 문학 비평 분야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서구의 이 지적 흐름은 그동안의 경직되고 고정된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에 종말을 고함으로써 문학비평 및 사회 비평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게 되었다. 실제 해체주의가 성립되는 과정은 구조주의에 대한 외부적인 부정이나 비판으로 부터라기보다는 구조주의 내에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던 자기 모순적이며 자기 부정적인 계기의 심화 발전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탈구조주의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구조주의를 비판하는 탈구조주의가 대두될 무렵, 푸코의 제자 데리다는 해체 이론을 통하여 구조주의를 비판하고 나서며, 또한 탈구조주의 조차 ‘해체’라는 무기로 비판한다. 데리다의 해체이론은 좀더 나아가서 서구 철학의 중심이 되어온 로고스 중심주의(Logo centrism)를 비판하며, 영역의 해체를 주장함으로서, 철학/문학/예술 등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해체이론이 문예비평이나 건축 등에서도 수용되고 있다.
이러한 확산으로 말미암아 다른 포스트모던 철학과의 관계 속에 새로운 유사성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철학 계에서는 해체를 이미 포스트모던의 한 경향으로 보는 인식이 대두되고 있다.
이처럼 해체주의 이론은 1960년대 후반 자크 데리다에 의해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되어 현재 서구의 사상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최근의 여러 가지 비평이론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철학 및 문학이론이다.
나. 해체주의
해체(deconstruction)는 오늘날의 예술과 건축, 그리고 문학비평 등에 있어서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경향들 중의 하나이다. 예술가들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해체에 관한 논쟁적 철학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많은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에 적용을 하고 있다.
이 개념은 1988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 전시회를 계기로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근대주의 건축의 확산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국제주의 양식: 1922년 이후의 건축>이라는 제하의 전시회를 50년 전에 헨리-러셀 히치코크와 함께 동일한 장소에서 준비하고 이끌었던 필립 존슨에 의해 이 전시회의 카다로그 서문이 쓰여졌다.
1) 해체주의 이론의 주요 개념
데리다의 해체이론은 의미와 기호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의미’란 주관에서 가져온 허구적 구조물일 뿐이다. 기존의 구조나 기호의 개념은 의미의 중심이 현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데리다는 이것을 하나의 환상이며 대체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외부로부터 파괴가 아닌, 내부의 근본적 해체를 추구하는 데리다의 해체이론은 ‘구조’나 ‘총체성’ 등에 대한 저항이며, 불안정과 무질서를 그대로 포용하며, 다양성과 열림을 추구하는 것으로, 더 이상 중심의 추구가 아닌, 중심의 부재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이론의 가치 및 의의는 삼각형이나 원으로 상징되는 안정과 정지의 상태를 추구하던 기존 형이상학의 토대를 해체하고 열린 다각형의 상태를 지향했다는 태도에 있게 된다. 해체이론의 주요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가) 해체(deconstruction)
데리다에 의하면 “해체운동은 구조를 외부로부터 붕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효과도 없다. 때문에 구조내에 정주하지 않고는 정확한 목표를 겨냥할 수 없다. 해체의 시도는 반드시 내부로부터 작용한다. 그것은 역전을 위한 전술과 힘을 오래된 구조로부터 빌릴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즉, 그 요소나 원자를 분리시키지 않은 채로 빌어온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데리다 철학의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해체란 기존의 구조에 대해 다른 구조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의 구조를 우회함으로써 그것을 지지하고 있던 제반 가치를 불안정한 상태로, 허공에 매단 상태로 만들면서 다른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또한 텍스트의 이론 및 분석의 존재방식으로서의 해체는 전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모든 것을 뒤집어 엎고, 기호와 언어, 텍스트, 컨텍스트, 작자, 독자, 역사의 역할, 해석의 임무, 비평형식 등에 대한 기존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나) 글쓰기(ecriture)
글쓰기는 프랑스어의 동사 ecriture(쓰다)의 명사형으로 쓰여진 것으로서 문자, 문체, 서적이라고 하는 의미와 쓰는 행위, 또는 쓰는 방법이라고 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데리다가 해체의 대상으로 삼은 서구의 형이상학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의미를 현전으로 규정해온 철학으로서 그것이 특권적인 주제로 택한 것은 음성이다. 그러므로 로고스중심주의는 음성중심주의이며 그것은 소리가 의식에 있어서의 직접적은 현전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음성언어는 생생한 자기 현전으로서 순수한 초월성을 띠는 것인 반면, 글쓰기는 음성언어로부터 파생된 2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서구의 형이상학 속에는 음성언어/글쓰기라고 하는 계층관계가 형성되어 왔다.
여기에 바로 데리다의 해체작업의 동기가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계층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이제까지 경멸되어온 글쓰기의 지위를 복권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의 해체작업이 시도하는 것은 이러한 계층관계를 강요해 왔던 형이상학의 욕망을 폭로하고 그 한계를 계속 지적하면서 폐기하는 일이다. 즉, 형이상학적 개념의 한계를 나타내면서, 그것의 상대적인 효과를 이용하고 그것의 개념을 포섭하는 형이상학을 붕괴시키는 일이다.
다) 흔적(Trace)
흔적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글쓰기보다 광범위한 개념이다. 흔적은 언어의 기원으로서 현진이 먼저 존재하여 그것이 남긴 흔적이 아니라 항상 기원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성립시키는 조건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데리다에 의하면 “흔적은 단순히 기원의 소멸이 아니라 기원이 소멸조차 하지 않았던 것, 기원이 일찍이 형성되었던 것은 비기원, 즉 흔적에 의해서 반작용으로 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흔적은 기원의 기원이 된다. 흔적은 이미 형성되고 있는 차이가 아니라 모든 내용이 결정되기 이전에 차이를 낳게 하는 순수작용이다.
절대적 진리나 의미는 흔적으로서 항상 유보되어 있으며 그 결과 실재로 제시되는 것도 실상은 허구이거나 은유일 뿐이다. 이 개념은 해체주의 디자인의 구성에 있어 꼴라쥬, 덧쓰기 등의 기법으로 적용된다.
라) 차연(Difference)
데리다가 만들어낸 신조어로, 재현행위는 결코 ‘그것’이 될 수 없으며, 단지 ‘그것’과 차이가 나고 (Difference), 그것을 유보, 지연시킬 수 있다는(Deferral) 이중적 개념이다.
차이를 의미하는 difference라는 단어와 똑같은 발음인 diffrance는 ‘e’를 ‘a’로 바꿔 만들어낸 데리다의 신조어이다. 차연이란 소위 미래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대해서도 똑같이 관계하는 흔적이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에 의해 현재라고 부른 것을 구성 하는 흔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것 자신이 아닌 것과의 관계이다. 즉, 형태를 변화시킨 현재로서의 과거이거나 미래가 아닌 그런 것과의 관계이다.
그것이 그것 자신이기 위해서는 일종의 간격이 현재 있지 않는 것으로부터 현재를 분리 시켜야만 하지만 그것을 현재로서 구성하는 이러한 간격은 동시에 현재를 당연 히 분할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 즉, 모든 존재자를 특히 실체나 주체를 우리의 형이상학적 용어로 분할해야 한다.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분할하는 이러한 간격은 이른바 ‘공간내기 (espacement)’, ‘시간의 공간화(devenir-espace do temps)’이거나 ‘공간의 시간화(devenir temps do 1’espace, 다시말해 temporisation-대기, 지연)’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차연의 작용을 가리키는 프랑스어가 없기 때문에 데리다는 “그것에 는 이름이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것은 이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체도 없는 순수한 기능이다. 그것은 하나의 단어일 수도 없고 개념일 수도 없다. 그것은 의미하는 것/의미된 것이라는 대립항의 작용 자체를 벗어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이처럼 실체성이 결여된 채로 ‘이름의 치환의 연쇄고리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이 연쇄고리를 성립시키는 작용이기도 하다.
제논의 역설들 가운데 하나인 날으는 화살을 예로 들어보자. 그 화살은 결코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특정한 지점에 정지해 있다. 그 화살의 운동은 현전의 어떤 순간에도 결코 현전하지 않는다. 운동의 현전은 단지 모든순간이 이미 과거와 미래의 흔적으로 표시되는 한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사실이 판명된 셈이다. 즉, 운동은 현전하는 순간이 제공한 어떤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사이의 관계의 산물인 경우에만 현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적 순간도 그것이 순수하고 자율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한에서는 근거로서 소용이 된다는 사실이 판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이 현전해야 한다면 현전은 이미 차이(보류, difference)와 지연(deferral)에 의해 표시되어야 한다. 운동의 예에서 보았듯이 현전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복합적이고 차별적이며 일련의 차이에 의해 표시되는 것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따라서 우리는 현전을 더 이상 존재의 절대적인 모형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존재의 ‘특수화’내지 ‘결과’로서 단정하게 된다. 하나의 체계 내에 있는 결정과 결과는 더 이상 현전의 결과가 아니라 차연의 결과이다.” 라고 말한다.
마) 산종(dissemination)
산종이란 본래 종자가 출생지로부터 다소라도 멀리 떨어져 여기저기에 뿌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 에 의해서 이 단어는 어떤 단어가 처음 사용된 장에서부터 떨어져 나가 곳곳에 흩어지고 새로운 의미 작용을 어떻게 해나가는 가를 가리킨다. 또한, 산종은 모든 사항을 적어도 잠재력으로 보충하고, 본질적으로 무한히 치환하게 하는 이론인 동시에 그것의 실천이다.
이같은 다의성은 의미의 결정불가성을 야기한다. 결정불가성은 관련 의미들의 무한성이라는 모호한 불확정성에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모순적인 두 가지 의미는 한 구역 내에서 동시에 조명되어진다. 그러므로, 산종은 해석의 실천이며 이 실천은 지시체와 진리가라는 의미론적 차원에 고려하지 않고 통사법적인 연관관계를 무한하다고 가정한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실천이다. 또한, 산종은 종국적인 해석을 추구하지 않는다. 많은 조합가능성을 추구하는 상황의 진행은 무한성으로 향한다. 왜냐하면, 해체와 산종은 원전의 의미에 대한 선행구성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 보충(suppIement)
외부로부터의 파괴가 아니라 내부의 근본적 해체를 통하여 불안정과 무질서를 그대로 포용하고 다양성과 열림을 추구한다.
보충이라는 개념에는 기묘할 정도로 필연적인 두 가지 의미작용이 동거하고 있다.
첫째로, 이 단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전체에 부가되는 일종의 ‘잉여’이고 ‘과잉’이며 ‘충실하게 하는 또 하나의 충실함’이다.
둘째로, 보충은 ‘대행한다(suppleer)’라는 의미이다. 즉, 대행한다는 것은 거기에 어떤 결여가 전제되기 때문이고 보충되어야 할 충실함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보충은 차연과 마찬가지로 데리다의 모든 텍스트 속에 있는 몇 가지의 동의어이자 상호 보충적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들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의미의 연쇄작용을 성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단어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보충은 데리다의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원리를 암시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데리다가 이제까지 쓴 것은 모두 텍스트에 대한 잉여임과 동시에 결여인 보충의 역할을 연출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글쓰기가 바로 그의 ‘텍스트’가 된 것이다.
사)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Text의 자율성(Autonomy)을 거부하며 언동해위(Discourse)의 형태들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중첩된다고 본다.
데리다에 의하면 모든 기호, 모든 텍스트는 자유롭게 인용될 수 있다. 인용부호로 묶는다는 것은 곧 그것을 종래의 문맥으로부터 분리시킴을 뜻한다. 그리고 인용이 계속됨에 따라 인용되는 텍스트의 의미 역시 산종된다. 즉, 모든 텍스트는 끊임없이 인용의 과정일 뿐이다. 완전끓 같은 문맥에서의 반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엄밀한 의미의 반복이란 불가능하다. 끊임없는 반복은 단지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산종되어나가는 끊임없는 인용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러한 인용과 반복을 통한 텍스트의 유희 또한 유희가 갖는 산종적 성격이 바로 데리다의 상호텍스트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데리다는 세계에 대한 모든 것들의 관계는 복합적으로 변화하고 지속해서 발전하는 상호 관계이기 때문에 텍스트의 자율성을 거부하며 언술행위의 형태들이 서로 독립적이 않고 중첩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건축, 문학, 철학, 회화, 음악 등과의 상호텍스트성을 주장하게 된다. ‘병행인용’이란 두개의 극단적인 텍스트의 어느 쪽에도 편중되지 않은 채 그 두 텍스트 사이의 공간(intertextual space)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양쪽 모두를 참조함으로써 중간적 영역에 입지하여 의미유보를 유도하고 경직성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결국, 상호텍스트성은 결정론적 독해를 몰아내고 ‘열려진 독해’의 지평을연다. 역사, 철학, 예술, 나아가 세계 일반은 유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 데리다의 텍스트
데리다의 해체론에서 해체라는 도구를 통해 데리다는 근대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무너뜨리기’를 시도한다. 이에 데리다는 “어떤 의미도 고정되거나 확정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해석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은 텍스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텍스트가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고 있다면 그 지시는 다른 텍스트들과 연결된다.
즉 마치 기호가 다른 기호를 지시하는 것처럼 텍스트 역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망상조직을 일으켜 다른 텍스트들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전략은 전통적인 저자와 작품의 개념을 분해하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해석과 고전적 역사에 대한 이해를 뒤흔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데리다의 텍스트의 한계
데리다는 전통적인 서구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분법적인 이데올로기의 파괴를 꾀하고 있다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와 외부와의 관계에서 데리다는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라는 주장을 한다. 데리다의 이러한 명제는 텍스트 외의 외부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든지, 텍스트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텍스트가 곧 세계이며, 모든 것을 기호의 연쇄를 통한 흔적의 집합인 텍스트로 간주하여 텍스트의 흔적을 읽어내려는 것이다. 이에 데리다에 있어서는 텍스트들의 관계에 의한 표현만이 드러나며, 이를 통한 의미 생성적 내용은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해체주의 건축 탐구 1편이었습니다. 와 다시봐도 전혀 잘 이해가 안되는 어려운 글들이에요.
저 당시는 어떻게 이렇게 조사를 할 수 있었는지 참 놀랍습니다. 다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네요^^
다음편은 해체주의 건축 사례 등이 나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글 링크_포스트&레이트모더니즘 건축_바로가기
*이전 글 링크_뉴욕5 건축_바로가기